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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산행노트

프롤로그: 아버지의 '산행기'

걷고있는 찌꺼 2019.02.19 18:40


이 사진은 84세이신 아버지가 99년 10월 12일 충남 서산 팔봉산에서 찍은 것이다. 1994년 4월부터 시작해 거의 매달 정기적으로 다니신 산악회를 더 이상 가지 못하게 된 것은 부모님이 인천으로 이사를 가시면서였다. 하남시에 소속되어 있는 산악회 출발지까지 인천에서 가시기에는 역부족이셨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녀오신 것이 99년 12월이니, 이 사진은 거의 마지막에 찍은 단독 사진이다.

당시 아버지 연세는 66세였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가 정말 많이 늙으셨다. 지금은 등산은 커녕, 거동도 잘 못하고 계시다. 아버지는 등산을 좋아하셔서 많은 회원들이 산행은 하지 않고 산자락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놀 때도 친하신 몇몇 분들과 꼭 정상까지 다녀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오셔서는 동호회에서 보내준 산에 대한 정보와 단체사진, 가끔 곁들여 있는 산행루트가 표시된 지도와 지난산행의 결산보고서까지 꼼꼼하게 파일에 정리를 하셨다. 파일 겉표지에는 '산행기'라는 제목과 산악회 마크와 아버지의 등산 동우회인 '하남동우산악회'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아버지의 산행기는 6년 동안의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는 알 수 없지만, 산행마다 도시락과 물, 간식을 잊지 않고 챙겨주신 분은 어머니셨다. 겨울이나 여름이나 항상 보온도시락과 보온병에 따뜻한 물과 음식을 새벽마다 정성스럽게 준비하신 어머니의 마음도 이 산행기 속에는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아버지는 가장 먼저, 다녀오신 산들의 순서를 이렇게 번호를 매겨가며 잘 기록해 놓으셨다. 총 70회 중에서 2회를 빠지셨고 그것을 제한 68회에 대한 기록이 꼼꼼하게 담겨 있다. 



산행 차례가 끝나고 등장하는 건 '하남동우산악인들의 다짐'이라는 글인데, 산악회 회원의 마음가짐에 해당하는 글이다. 아버지의 산악회는 옛날 '하남시'에서 공무원을 하셨던 분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고 지역주민들도 자유롭게 가입할 수 있는 열린 조직이었다. 아버님들께서 작성하신 '하남동우산악인들의 다짐'에는 산을 대하는 귀한 마음이 담겨 있지만, 너무 진지해 웃기기도 하다.ㅋㅋ 



아버지의 산행기는 1994년 4월 화양계곡으로 시작한다. 산행마다 단체사진을 항상 찍으셨는데, 거의 같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등산복이라야 대단할 것이 없고 그저 간편한 차림에 등산운동화와 단체로 맞춘 면조끼와 등산모자를 착용하는 정도였다. 그런 탓에 사진속 모습들이 너무 비슷하다. 하도 비슷해 단체 사진속에서 아버지를 찾는 건 마치 '월리를 찾아라'에서 월리를 찾는 기분이다. 다행히 딸인 나는 아버지를 잘 찾고 있다.



위 사진은 아버지가 참여하지 못하신 첫 번째 산행정보이다. 이런 프린트물이 여러 장 존재하고, 이것들은 다른 파일에 따로 챙겨놓으셨다. 다녀오지 못한 것에 대한 서운함으로 버리지 못한 채 간직하신 것 같고, 이마저도 더는 없는 것으로 보아 그때는 이미 산악회를 탈퇴하신 모양이셨다. 아버지께서 정성스럽게 챙기고 정리해 놓은 산행기를 보니, 마음이 짠하다.

나는 이 산행노트를 아버지한테 얻어왔다. 그 이유는 이 산행기를 따라 아버지가 다녀오신 산들을 가보고 싶어서였다. 순서는 똑같이 하지 않고 그때그때 계절과 상황에 맞게 아버지의 산행을 뒤쫓아 볼 생각이다. 아버지께서 산을 다니시면서 바라보셨을 풍경과 발걸음을 쫓으며, 내가 무엇을 찾고 싶은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저 그 발길을 따라 걷다보면, 내 몸속에 존재하는 아버지가 세월을 거슬러 바로 그 자리에서, 그 풍경 속에서 내게 말을 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산행을 쫓는 이 작업이 더이상 산행을 못 다니시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산행기'를 보지 못한 가족들에게 즐거운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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